| 백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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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 |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동천동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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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588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라고 전하고 있다. 창건 당초는 자추사(刺楸寺)로 불렀는데, 어느 시기(통일신라)인지 정확치는 않으나 백률사(柏栗寺)로 불리게 되어졌다.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이 순교할 때 그의 머리가 이 산에 떨어졌다고 기록한 "이차돈 육면석당(六面石幢)"이 이 백율사에 있었다는 것과, 자추사라고 불리워지게 되는 어원에서도 백율사가 곧 자추사인 것을 알게 된다. (刺楸寺의 "刺楸"는 "柏栗"과 상통되는데, 刺는 잣(柏)의 한자음이 되며, "楸"는 밤(栗)의 일종으로서 "栗"가 통한다)
창건 당시의 규모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조선선조때(1600년대) 중창되었다고 전하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집으로된 대웅전이 있고, 근세에 새로 지은 요사 2동과,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삼성각과 최근에 세운 종각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은, 석등 옥개석 1점·복판연화문과 귀꽃이 있는 불상대좌 중대석 1점·팔엽복판연하문이 새겨진 석등하대석 1점·석정개석(石井蓋石)1점·팔엽단판系 연판(蓮瓣)의 석등 중대석 1점·원형초석 2점으로 종각 남쪽앞 귀퉁이에 모아 놓았다.
대웅전 앞의 마주보는 암벽에 높이 3.15m, 상층 기단폭 1.4m의 마애 3층탑 1기가 선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암벽면을 가공하지 않은 자연면에다 그대로 조각한 것으로, 하층기단은 생략한 채 상층기단위에 비례를 감안한 적당한 크기의 탑신과 층급받침인 3단의 옥개로 3층을 만들고 보주와 용차등을 상륜부도 새겨놓은 이탑은 바깥쪽 윤곽만 조각하고 내부는 조각하지 않았다. 탑의 비례, 옥개석 층급 받침이 3단인 점, 하층기단이 생략된 점등으로 보아 통일 신라 下代의 일반형 석탑을 模刻한 것으로 생각되고 제작년대도 통일신라 하대 또는 고려초에 제작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1983년 7월 대웅전 부근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금동여래입상(高5.0㎝) 1체, 이형금동구(異形金銅具, 長 5.5㎝) 1점, 연하문 원와당(직경 12.0∼15.6㎝) 6점, 당초문평와당 1점, 고려시대의 귀목문 원와당(직경 14.5㎝) 1점, 연화당초문 평와당 3점이 출토되었다. 경주 박물관에 진열중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 이차돈6면석당도 이 사찰에 있던 것을 1914년에 옮긴 것이다.
또한 기록상으로만 전해오는 중국 공장(工匠)이 만들었다는 영험 많은 대비상(大悲像, 관세음보살상)도 백의관음이라 하여 조선시대까지 보존되어 있었다 하나 그 흔적을 알 수 없고, 전단목( 檀木)으로 만든 불상도 또한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종각과 요사가 자리한 곳에 서루(西樓)라고 불리운 누각중의 누각이 1917년까지도 있었다고 하나 자취를 알 수 없다. 나라에서 향을 내려주어 왕실의 복을 비는 사찰로서 사대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며, 금강산에 있는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창건이래 법등(法燈)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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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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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파식적과 국선 부례랑 설화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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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년 9월 7일 효소왕은 부례랑을 국선으로 삼았는데, 그 문객이 천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도 안상과 더욱 친했다. 693년 3월에 부례랑(夫禮郞)이 무리를 거느리고 강원도 금란(金蘭:지금의 통천)에 놀러나가 북명(北暝)의 지경(地境)에 이르렀다가 말갈적에게 붙잡혀 가게되었다. 이에 문객들은 당황하여 되돌아왔고 안상만이 그의 뒤를 쫓아갔다.
효소왕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말하기를, '선왕께서 만파식적을 얻어 나에게 전하여 지금 현금(玄琴)과 함께 천존고(天尊庫)에 간수해 두었는데, 무슨 일로 국선이 갑자기 말갈적에게 붙잡혀 갔는지 그 이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도다.' 그 때에 마침 이상한 구름이 천존고를 덮었으므로 효소왕이 더욱 두려워하여 그것을 조사하도록 했더니 창고 안에 보관해 두었던 만파식적(萬波息笛)과 현금이 모두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에 효소왕은 '내가 복이 없어 국선을 잃고 또 두가지 보물까지 잃게 되었구나.' 하고 탄식하면서 창고를 지키던 5명을 가두고 널리 알리기를, '두 보물을 찾는 사람은 1년의 조세로 상금을 주겠노라.'고 하였다.
5월 15일에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의 관음보살상 앞에 가서 여러 날 저녁 기도를 드렸더니, 난데없이 향을 피우는 탁자 위에 만파식적과 현금(玄琴)이 나타났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관음보살상 뒤 쪽에 와 있었다. 부례랑의 양친은 매우 기뻐하면서 그 동안의 내력을 물어보았다. "저는 말갈적에게 잡혀 간 뒤부터 대도구라(大都仇羅) 집의 말먹이꾼이 되어 들판에서 방목하는 일을 맡아 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용의단정한 스님 한 분이 나타나서 만파식적과 현금을 손에 들고 저를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고향생각을 하고 있는가?' 라고 하기에 저도 모르게 스님 앞에 꿇어앉아 '임금님과 부모님을 그리워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했더니 그 스님께서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라'하면서 저를 데리고 해변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안상과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만파식적을 둘로 쪼개어 우리 두 사람에게 한 짝씩 타게하고 스님은 현금을 탔는데, 둥실둥실 떠 가더니 잠깐 동안에 이곳까지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급히 효소왕께 알렸더니 크게 놀라면서 그들을 환영하였고, 부례랑은 만파식적과 현금을 가지고 대궐로 들어갔다. 효소왕은 너무나 감격하여 금은으로 된 그릇과 가사(袈裟), 전답 등을 백률사에 공양하여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했다. 그리고 창고를 지켰던 관리를 포함한 국내의 모든 죄인들을 석방하고, 백성들에게는 3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6월 12일에 혜성(慧星)이 동쪽에 나타나니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기를, "이것은 만파식적과 현금에 대해 봉작(封爵)을 내리지 않은 표징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효소왕은 만파식적을 만만파파식적이라 높혀 불렀더니 비로소 혜성이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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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파식적과 국선 부례랑 설화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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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례랑은 효소왕(32대) 때의 사람으로 당시 수많은 낭도들에게 존경을 받던 화랑이었다. 그를 따르는 낭도들은 1천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안상과 더욱 친했다. 693년 3월 부례랑은 낭도들을 거느리고, 금란(강원도 통천)지방을 순회하였는데 북연(원산만 부근)에 이르렀을때 문득 국경을 지키고 있던 말갈적들이 습격해 와서 부례랑을 납치해 갔다. 인솔자를 잃어버린 낭도들은 어찌할 줄 몰라 부례랑을 구출할 방도가 없으므로 각각 흩어져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안상만이 부례랑이 잡혀간 뒤를 쫓아 적국으로 들어갔다. 부례랑이 붙잡혀 간날이 3월 11일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대왕은 크게 슬퍼하여 천존고를 지키는 김정고를 불러 만파식적과 현금이 제대로 있는가 살피게 하였다.
선왕(문무왕)께서 동해의 대왕암 부근에서 얻은 만파식적과 현금을 천존고에 넣어 두시고, 이 두 가지 보물이 있는 한 나라에 흉한 일이 없을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천존고에 소중하게 보관하여 밤을 교대하며 지키고 있던 만파식적과 현금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었다. 대왕은 "내가 어찌하여 이렇게도 복이 없어서 국선(화랑)을 잃고, 또 신적과 현금까지 잃었던가. 선황께 면목없는 일이로다."하며 크게 탄식하였다. 창고를 지키고 있던 김정고 등 5명 모두를 가두고, 현금과 만파식적을 찾는 사람에게는 1년의 조세로서 상을 줄 것이라고 전국에 선포하였다. 그러나 만파식적을 봤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부례랑의 부모들은 부례랑을 위하여 백율사의 부처님께 날마다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올렸다. 부례랑이 잡혀간지 두달이 지난 5월 15일 부례랑의 부모들이 전날과 같이 백율사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법당 천정에서 '둥기당' 소리가 나더니 나라의 보물인 현금과 만파식적이 내려와 향탁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닌가? 부례랑의 부모들은 깜짝 놀래서 눈을 의심하여 두 보물을 살펴보는데 "아버님 어머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하며 부처님 뒤에서 부례랑이 나타났다. 또 그 뒤에 안상도 따라 나오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냐. 우리는 너의 안부를 몰라 부처님께 빌고만 있었다." 하며 부모님은 기뻐하며 지난날의 내력을 물었다.
"저는 말갈적에 잡혀간 후 적국 대도구리의 종이 되어 그 집 말을 먹이는 일 을 맡아 하였습니다. 대조미란 뜰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있는데 모습이 단정한 스님 한분이 손에 현금과 신적을 들고 와서 너는 지금 고향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기에 저는 그 앞에 꿇어 앉아서 임금님과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이 심정을 어찌 다 말로 할 수있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스님은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라 하기에 스님을 따라갔더니 어느 해변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나를 찾아 헤매고 있는 친구 안상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신적을 두개로 쪼개더니 바다 위에 띄어놓고, 안상과 저를 각각 거기에 타라 하셨습니다. 스님 자신은 현금을 타고, 물위에 뜨셨는데 처음에는 둥실둥실 배처럼 물위로 흘러 갔으나 잠시 후에는 쏜살같이 나아가서 이곳에 온 것입니다." 하며 부처님을 쳐다보더니 "아! 그 스님의 모습은 부처님과 꼭 같은 모습이었습니다."하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부처님 향탁 위에는 두개로 쪼개졌던 신적이 합쳐져 하나가 되어 현금과 같이 나란히 있었으니 백율사 부처님의 위력이라 하며 모두 감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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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파식적과 국선 부례랑 설화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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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례랑의 아버지 대현아동은 이 사실을 곧 대왕님께 아뢰었다. 대왕은 기뻐하며 두 사람을 대궐에서 맞았다. 부례랑과 안상은 만파식적과 현금을 대왕께 바치니 대왕은 부례랑에게 대각간으로 벼슬을 올려주고, 안상은 대통으로 삼았다. 그리고 부례랑의 아버지 대현이찬에게는 신라 최고의 벼슬인 태대각간을 주고, 어머니 용보부인은 경정궁주로 삼았다.
천존고를 지키고 있다가 옥에 갇힌 김정고 등은 모두 놓아주고, 관사 옥급을 주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모든 관리들은 벼슬을 높여주고, 백성들에게도 3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고, 죄인들을 놓아 주었다. 특히 백율사에는 금은기 다섯 개씩 두 벌(각 50량중)과 마병가사 다섯 벌, 비단 삼천 필, 밭 일만경을 바치어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였다.
백율사의 주지스님은 봉성사로 옮겨 살게 되었다. 대왕은 이와 같이 국보와 국선을 다시 찾은데 대한 감사를 부처님께 지극한 정성으로 보답하였고, 온 국민들에게 골고루 베풀었는데 6월 12일경에 이르러 동방에서 혜성이 나타나서 사라지지 않더니 17일에는 서쪽 하늘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일관이 대왕께 아뢰기를 "이것은 이번 일에 부처님과 온 국민에게 골고루 대왕님이 성의를 보이셨는데 현금과 신적에게는 성의를 보이시지 아니한 까닭이옵니다." 하였다.
대왕은 신적을 받들어 이제부터 이 대금을 만파식적이라 부르라 하였더니 혜성이 그제서야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785년 신라 38대 원성왕이 즉위하시니 왕의 아버지이신 효양 대각간이 선조때 부터 전해오던 만파식적을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를 받아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
786년 10월 11일 일본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어 적군을 물리쳤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왔다. 사신은 왕에게 금 50냥을 바치면서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보자고 청했다. 왕은 "내가 알기로는 우리 조상 진평왕때에 그러한 보물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라고 거짓말로 잡아떼었다.
그 이듬해 7월7일에 일본왕은 또 사신을 보내왔다. 이번에는 금 1천량을 바치면서 "신비로운 만파식적을 한번만 보여주면 그것을 꼭 돌려 보내겠다"하며 간청하였다. 왕은 이번에도 전과 같은 대답을 하고, 금 1천량은 일본에게 돌려주고, 그 사신에게는 은 삼천량을 주면서 일본왕에게 사정을 잘 전하라고 하였다.
일본 사신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8월에 돌아갔다. 왕은 만파식적을 내황고에 보관하였다. 만파식적은 신라 왕실의 귀중한 보물이 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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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율사금동약사여래입상
(경상북도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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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경주시< 慶州市 > 북쪽 소금강산< 小金剛山 >의 백률사< 栢栗寺 >에 있던 것을 1930년 국립경주박물관< 國立慶州博物館 >에 옮겨 놓았다. 등신대< 等身大 >의 거대한 입상< 立像 >으로서, 보발< 寶髮 >은 나발< 螺髮 >이고 얼굴은 풍만하여 온화하게 보인다. 정시< 正視 >한 두 눈, 반월< 半月 >의 두 눈썹, 높은 콧날, 큼직하게 다문 입 등에서 자비가 넘친다. 두 귀는 길고 목에는 삼도< 三道 >가 뚜렷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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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율사대웅전
(경상북도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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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柏栗寺>는 신라<新羅> 제 23대 법흥왕<法興王> 14년(527)에 신라가 불교를 나라의 종교<宗敎>로 삼도록 순교<殉敎>한 이차돈<異次頓>을 기리기 위하여 이룩한 사찰<寺刹>로서 일명 자추사<刺楸寺>라고도 한다. 이 대웅전의 건물은 임진왜란때 불타고 그 후에 재건<再建>된 것으로 단층<單層>의 목조<木造> 기와집으로 지붕의 형태는 팔작<八作>이다. 대웅전에 모셨던 금동약사여래좌상<金銅藥師如來坐像>은 현재 불국사<佛國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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