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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국보205호(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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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분류 :
[석조-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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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수량 :
1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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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
198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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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 :
국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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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충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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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여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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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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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원고구려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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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 |
소재지 :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28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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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고구려비는 국보 제205호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있다. 중원 고구려비의 발견은 신라 진흥왕이 북진을 하면서 곳곳에 순수비를 세웠듯이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 땅을 빼앗은 고구려도 반드시 순수비를 세웠을 터이니 국원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가금면 일원을 찾기 1년여, 1979년 2월 24일 드디어 가금면 용전리 입석(立石) 마을 입구에서 고구려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풍화로 비문이 심하게 마멸되어 분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의 여러성을공략하고 개척한후에 세운 기념비이다. 5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판독된 비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발견 당시의 상태는 전면(前面)에 바위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육안으로는 물론 탁본하여도 판독이 어려울 정도였다. 결국 이끼를 제거하고 조사한 결과 석비(石碑)의 형태는 석주형(石柱形)으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각자면(刻字面)을 갈고 비문을 새겼고 석질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글자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가장 넓은 면인 전면(前面)에 글씨가 가장 많이 남아 있었다. 각면은 높이가 전면(前面) 203㎝(碑面 높이 144m), 후면(後面) 188㎝(126), 좌측면 197㎝(141), 우측면 178㎝(136)인데 모두 다듬어졌으며 글자가 새겨진 부분과 행간(行間)으로 생각되는 부문에 차이가 있어 모든 면에 글자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 글자의 크기는 3~5㎝ 정도이며 1행(行)은 23자로 되어 있는데 전면은 10행 230자, 좌측면은 7행 155자가 확인되었으며 우측면에도 6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2000년 2월 26일 중원 고구려비 신석문 위원회(37명)에서 우측면에서 '前部大兄'이라는 고구려장관급 벼슬을 읽어내므로 측면에 모두 글자를 새겼으며 세밀한 판독결과 후면에서도 글자의 흔적이 뚜렷한데 의견을 모아 '巡'자와 비슷한 글자를 읽어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비석의 네 면에 모두 글자를 새겼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서두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문자가 보이고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하부(下部), 사자(使者), 대형(大兄)' 등은 모두 고구려 관등명들이며, 비문 중의 '고모루성(高牟蔞城)'은 광개토대왕비에 보이는 성이므로 고구려의 비임이 분명하다. 석비 자체의 형태도 광개토왕비와 흡사하며 두툼하고 무게도 있어 보인다. 그리고 발견된 곳이 중원지역이란 점은 건립시기를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한 5세기 전후로 좁혀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비문의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어렵고 그래서 전면(前面)에 대한 판독도 이견(異見)이 많다. 그래서 「중원 고구려비」가 3면비인가, 아니면 4면비인가, 비의 시작면이 어디인가, 비의 건립 연대, 비문의 내용도 서로 다르게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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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고구려비가 지닌 중요한 의미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원 고구려비」는 아직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한국 고대사에서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바 그중 몇가지를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 비라는 점이다. 중원 지역은 장미산성(墻尾山城)과 봉황리 마애불상(鳳凰里 磨崖佛像) 등과 더불어 삼국시대의 유적, 유물들이 많으며 그 가운데에는 고구려비의 소재지 서쪽에 인접한 노은동에서 1915년에 발견된 「建興五年銘金銅光背(건흥오년명금동광배)」와 같은 고구려의 유물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서 「고구려비」가 나온 것이 예상밖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물론 「중원 고구려비」는 「광개토왕릉비」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기왕에 알려진 고구려비로서는 유일한 「광개토왕릉비」가 중국의 집안현(集安縣)에 있음을 생각할 때 「중원 고구려비」의 발견은 큰 수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②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지견(智見)을 더해 주었다. 당시 고구려에 대해 신라가 종속적인 입장에 있었음은 「삼국사기」를 통해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東夷)로 칭하면서 종주국으로서 의복을 하사했다는 것은 「중원 고구려비」에서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또 신라 영토내에 고구려가 주둔하고 있었음은 「일본서기」에도 보이는 바이나 자료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었는데 「중원 고구려비」에 '新羅土內 撞主'란 직명이 있어 이를 확인 할 수 있게 해준다.
③ 고구려인의 인명표기 방법을 알려준다. 신라의 인명표기 방법은 「진흥왕순수비」 등을 통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구려의 경우는 그 동안 몇 가지 금석문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파악되지 못해왔다. 그러나 「중원 고구려비」에 '新羅土內撞主下部拔位便者補奴(신라토내당주하부발위편자보노)·古矣婁城守事下部大形耶□(고의루성수사하부대형야□)'가 확인됨으로써 고구려에서는 職名-部名-管等名-人名의 순으로 인명표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④ 고구려 관등조직의 정비 과정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를 준다. 고구려의 관등조직(官等組織)은 고구려의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성립되기 시작하여 고구려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분화되고 체계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역대 정사의 고구려전 등에 열거된 고구려 관등명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중원 고구려비」에 보이는 拔位便者(발위편자)는 641년경에 이루어진 「고려기(高麗記)」에 처음 보이고 있다. 주서(周書)」에 보이는 '욕사(褥奢)'가 발위사자와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주서(周書)」는 6세기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원 고구려비」으이 발위사자는 고구려의 관등 분화가 문헌사료를 통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일찍부터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⑤ 문의 '節敎事(절교사)' 등의 표현은 고구려에서도 이두식(李讀式) 표기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고구려에서 이두식 표기의 사용은 「평양성석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중원고구려비」가 이두식 표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순한문으로 된 「광개토왕릉비」에 비해 격이 떨이지는 비임을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중원 고구려비」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자료인 만큼 앞으로도 계속적인 검토가 있어야 하겠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비문의 판독작업이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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