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림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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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오층전탑과 아담한 사찰 |
소재지 :
경북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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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사는 가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동화사의 말사이며 진흥왕 5년(544) 진나라에서 귀국한 명관(明觀)스님이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한다. 고려 선종 9년(1092)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중창되었고, 고종 22년(1235) 몽고병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되었는데, 다시 1597년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 빈터만 남게 되었다. 그 뒤 숙종 12년(1686) 기성(箕城)대사, 철종 9년(1858) 영추(永樞)스님에 의해 중창되어 오늘에 이른다.
길을 따라 쌓여져 있는 돌담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아담한 절 뜰 가운데 엄청난 크기의 오층전탑이 가장 먼저 보인다. 이 탑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 189호이다. 1959년 해체복원시 발견된 사리장엄구 등의 유물은 보물 제 325호 지정되어 국립 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전탑 뒤로 삼성각과 산신각을 옆으로 거느린 대웅전이 위치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현판은 숙종의 친필이며, 안에는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큰 목(木)불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의 왼편 앞에는 전국에서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하는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의 벽면에는 앞면을 제외하고 3면의 벽에 오역의 대죄를 범한 무리를 심판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염라대왕을 포함한 저승의 판관, 시왕들이 죄의 경중을 심판하고 그에 따른 갖가지 고통을 묘사한 그림들이다.
그리고 대웅전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윗부분이 부러져 있는 당간지주가 있고, 오층전탑 서편에는 신라시대의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석등이 위치해 있다.
송림사는 도로변을 있어 쉽게 둘러볼 수 있는 조용한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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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교통
* 대구북부정류장 -> 동명 기성리 하차 (1일 13회 운행, 약 15분 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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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림사 창건 설화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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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추운 겨울날, 어느 마을 부자집에 초상이 났다. 장사 전날 밤 상주의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내 시키는대로 한다면 너의 집안은 복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 장례를 끝마치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물건이나 음식을 주지마라"
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조상님이 현몽한 것으로 믿은 상주는 조문객이나 인부들에게 음식을 못먹게 했으며 장례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음식을 챙겨 인부로 하여금 집으로 가게 했다. 그러나 인부를 시킨 것이 걱정이 되어 자신이 직접 뒤쫓아 가기로 하고 남아 있는 인부들에게 장례물건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주지말 것을 신신 당부했다. 산에서는 인부들이 허기 속에 일을 마치고 지푸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태우기 시작했다. 이 때 갑자기 위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거지아이가 모닥불 옆으로 다가와 떨며 애원했다.
"오늘밤 얼어 죽을 것 같습니다. 제발 그 가마니 한 장만 주십시오."
측은한 마음이 든 인부들은 상의 끝에 헌가마니 한 장을 줘 보내고 연장을 챙겨 막 내려오고 하는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거지아이가 가고 있던 그 자리에는 웅장한 절이 생기고, 가마니는 그 절의 대웅전에 걸려 있었다. 그 후 과연 그 상주 집안은 점점 몰락하고 대도 끊기고 말았다. 그러나 거지아이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었던 인부들은 점점 살림이 일고 자손도 번창하였으며 소나무 숲에서 생긴 절이라 하여 '송림사(松林寺)'라 하였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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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림사 창건 설화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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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미추왕 혹은 내물왕 대에 아들 3형제가 부친의 묘지를 파기 위해 이 절이 서 있는 자리를 정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 묘를 파기로 하고 그들은 집으로 와 잠을 청했다. 그날 밤 맏아들의 꿈속에 현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내일 묘를 파노라면 반드시 어떤 사람 하나가 나타날 것이다. 그 사람은 묘를 팔 동안에 나무에 묶어 두면 반드시 후환이 없을 것이다"
라고 이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날 그 맏아들은 동생들을 데리고 묘를 파러 갔다. 열심히 묘자리를 파는데 잠시 소동이 나더니 왠 사나이가 서 있었다. 즉시 형제들은 현인이 이른 대로 그를 잡아 나무에 묶자 그는 소리치며 죄도 없는 자기를 묶어 두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애걸하자 그 맏아들은 어젯밤 일을 개의치 않고 그를 풀어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과 회오리바람이 일고 반대편에 산이 생기고 절이 생겨났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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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부러진 5층전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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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사 경내에 자리잡고 있는 5층 전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탑신 동륜괘 속에 든 사리 등을 약탈하려고 들이닥쳤다. 스님들이 부를 보니 왜인은 '송'자를 무서워 할 것으로 나와, 왜적들이 탑 윗부분 상륜부에 밧줄을 걸어 당기는 순간 "송림사!"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청천 백일에 뇌성이 일고 탑 속에서 큰소리가 나기 시 작하여 왜적들은 혼비백산 도주하였다 한다. 이 때문에 전탑의 상륜부가 구부러졌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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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림리 한지와 장군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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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언저리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하여 송림(松林)이란 지명이 붙은 용성면 송림리는 개척 이전부터 마을 동북간에 신라 때 창건한 송림사(松林寺)라는 큰 고찰이 있었다.
당시 이 마을 주변에는 소나무 외에도 자연산 딱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송림리 개척과 거의 같은 시기에 송림사에 기거하던 한 스님이 딱나무로 한지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구한말까지 이 마을은 영남권에서도 빼어난 한지 마을로 알려져 왔다. 송림사가 번창한 시기에 이 마을이 개척되면서 송림사 스님의 한지 제작 기술을 이어받은 송림리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지 제작에 종사하게 되어 한때 용성면에서 손꼽히는 부촌이었다.
송림사의 폐사 원인은 누군가에 의하여 실화로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절터가 있었던 곳은 지금 송림지와 송림댐이 되었다. 일제 때 송림지를 준설하면서 군데군데 남아있던 사찰 석조물은 송림지 제방 축조에 사용하였으므로 이후는 절터라는 흔적조차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일설에는 송림사가 불타자, 그 절 부처님의 불력으로 남은 사찰건물을 지금의 칠곡군 소재 송림사로 옮겼다는 전설도 있다.
원래 송림리에는 다른 지방에 없는 민간 토속신앙이 전하고 있는데 이가 곧 한장군 신앙이다. 한장군은 자인면에서 발원한 전설에 의하여 이 지방인들의 민간 신앙으로 추앙한 것인데,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앞산에다 조그마한 사당을 짖고, 해마다 오월 단오날 뜻을 모아 한장군제를 올렸다. 그러나 일제 때 와서 왜구의 저지로 단오제가 일시 중단되자 마을 앞 한장군 사당은 폐허가 되고, 주변의 칡덩굴이 사당을 애워싸 후일에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장군 추앙 당시 이 마을 주민들이 오르내리며 모았던 돌무더기와 칡넝쿨은 현재까지도 무성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장군듬」이라 부르며 감히 근접하지 못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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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현판]
숙종의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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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불상]
국내에서 제일 큰 목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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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전 벽면 그림]
죄 심판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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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사오층전탑
(경상북도 칠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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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사 오층전탑은 9세기의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높이는 16.13m이다. 전탑은 점토를 가마에서 구워 만든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만든 탑으로, 우리나라에는 오직 다섯 기가 남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송림사 오층전탑이다.
이 탑은 전탑의 일반적인 특징대로 화강암과 토축으로 이루어진 단층기단 위에 탑신을 세웠다. 방형(方形)의 벽돌과 장방형(長方形)의 벽돌을 사용하여 이중으로 쌓아올린 탑신은 1층 탑신에서 2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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