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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신라 고승 원효와 자장의 숨결이 남겨진 호국사찰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2

신라 27대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된 호국사찰.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쟁국사비귀부(和諍國師碑龜趺) 모전석탑 등과 절 바깥에 당간지주만 남아있다.
이 곳은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살다 간 곳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는 해동종을 창시하였는데 그것이 분황종이라고 불릴 만큼 분황사와 원효는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원효가 입적하자 아들 설총이 원효의 유해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는데 설총이 예배할 때마다 소상이 고개를 돌려 돌아다 보았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국보 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인 분황사탑이 있다. 자장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이 탑은 원래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고려시대 구리 30만 6천 7백근을 들여 약사여래불상을 만들어 안치했다고 하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를 그려 유명한 솔거의 관세음보살상 벽화도 있었다고 하나 역시 남아있지 않다. 1965년 뒤쪽 부근 웅덩이에서 좌불 등 많은 양의 석불들이 발견되어경주국립박물관에 진열되었다.


  찾아가는 길
◇ 대중교통
● 경주시외버스터미널 경주역 ⇒ 보문행 시내버스 이용 분황사앞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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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
  • 원효의 가르침
  •   원효가 요석공주와 파계를 한 뒤 환속하여 살다 다시 분황사로 돌아와 있을 때였다. 원효는 이미 요석공주와의 인연에서 벗어나 있었으나 요석공주는 그렇지 못했다.
    어느날 가을 요석공주는 가을 옷을 만들어 아들 설총을 통해 원효에게 보냈다.그동안 여러차례 옷을 지어 보냈으나 원효는 입지 않았다. 이미 인연을 끝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석공주는 신동이라고 불리는 원효의 아들을 계속 아버지에게 보낸 것이다.
    아들 설총이 왔다는 말에도 묵묵부답으로 있던 원효는 갑자기 설총엑 마당을 깨끗이 쓸 것으로 지시했다.
    설총을 그 말을 따라 마당을 깨끗이 쓸었다. 그러나 원효는 다시 쓸라고 했다. 설총을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말없이 마당을 다시 쓸었다.
    잠시후 원효는 마당으로 내려와서는 갑자기 은행나무를 마구 흔드는 것이었다. 방금 깨끗이 청소한 마당은 금세 떨어진 은행잎으로 다시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그것이 가을 마당으로서는 자연스러웠다.
    이에 설총은 아버지 원효의 경지를 깨닫고 돌아갔다. 그후 설총도 자신만의 경지를 이루었다.
  • 광덕과 엄장 설화
  •   문무왕때 광덕과 엄장이라는 두 스님이 있었다. 절친한 사이였던 이들은 누구든 먼저 극락으로 들어가는 자는 반드시 서로 알리자는 약속을 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리에 숨어 신 삼는 것을 업으로 하여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어느 날 석양 무렵 엄장이 집에 있는데 창 밖에서 광덕의 목소리가 들렸다.
    "광덕아 나는 이제 서쪽으로 간다."
    광덕이 죽은 것이었다. 엄장은 광덕의 장사를 지내고 나서 광덕의 처에게 같이 살자고 말했고 이에 광덕의 처도 허락하였다.
    그런데 밤에 엄장이 관계를 맺으려 하니 부인이 거절하면서 "스님이 서방극락을 구함은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고 하였다.
    엄장이 의아히 여겨 물었다. "광덕이 이미 그러했는데 나는 왜 안된다 말이오?"
    이에 부인이 말하길 "남편은 저와 10여년을 동거하였으나 하루밤도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밤마다 앉아 나무아미타불만 외었습니다. 대개 천리를 가는 사람은 그 첫 걸음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스님의 생각이 동쪽에 있으니 서방은 미쳐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엄장은 부끄러워 그 자리에서 물러나났다. 엄장은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으며 한 마음으로 수양을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광덕을 뒤를 좇아 서방극락으로 갔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해져 온다.
  • 아이의 눈을 뜨게 한 노래
  •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얘기.
    경덕왕때 서라벌 동쪽에 있는 한기리라는 마을에 희명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의 아이가 5살때 갑자기 두 눈이 멀어 버렸다. 희영은 아이를 안고 분황사에 그려진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앞에 갔다. 눈 먼 아이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

    무릎을 곧추며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전에 비옵나이다
    천 손에 천 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어
    둘다없는 내몸이오니
    하나만 가만히 고쳐 주시옵소서
    아아 임은 예사로운 듯 베푸시는데
    내게 주옵시는
    큰 자비는 너무 커서 말 못하겠네.

    희영은 아이를 날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앞으로 데려갔고 아이는 그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그러던 중 어느날 아이는 갑자기 두 눈을 뜨게 되었다.
      입장료
      어른 학생 어린이 군인
    개인 1,000원 800원 600원 800원
    단체 1,000원 700원 500원 700원
      국보
  • 분황사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 자세히..
     
    전돌로 쌓은 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석탑< 模塼石塔 >이라고
    이 석탑< 石塔 >은 돌을 흙으로 구워 만든 전돌< 塼石 >처럼 깎아 만들어 쌓은 석탑으로, 전돌로 쌓은 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석탑< 模塼石塔 >이라고 부른다. 탑이 세워진 것을 분황사< 芬皇寺 > 창건< 創建 >과 같은 신라 선덕여왕< 善德女王 > 3년(634)으로 보고 있으며, 3층으로 되어있는 지금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것으로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수리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
      시도유형문화재
  • 분황사화쟁국사비부 (경상북도 경주시)
  • 자세히..
      분황사<芬皇寺> 경내에 있으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원효의 화쟁국사비부이다. 고려 숙종 6년(1101),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諡號>가 없어 그 덕이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그 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를 확인하고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靜國師之碑蹟>이라고 써 놓았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
      문화재자료
  • 분황사석정 (경상북도 경주시)
  • 자세히..
      석정< 石井 >은 바위틈 사이로 솟거나 흐르는 물을 고이게 바위를 옴폭하게 파고, 그 위에 다시 시설< 施設 >을 해 만든 우물이다. 이 우물은 신라시대< 新羅時代 > 유물< 遺物 >로 원형의 벽체< 壁體 >를 쌓아 올리고, 외부< 外部 >는 팔각< 八角 >으로 다듬은 형태< 形態 >로 불교< 佛敎 >의 팔정도< 八正道 >와 원융< 圓融 >의 의미< 意味 >를 지니고 있다. 호국룡< 護國龍 > 변어정< 變魚井 >이라고 불리는 ...
      문화재자료
  • 분황사약사여래입상 (경상북도 경주시)
  • 자세히..
      우수<右手>에 들고 있는 약합<藥盒>뚜껑 내면<內面>에 "건륭<乾隆> 39년 을미<乙未> 4월 25일 조성야<造成也>……"의 기명이 있으나 건륭 39년은 사실 을미가 아니라 갑오<甲午>이다. 어쨌든 양식<樣式>이나 조형기법<造形技法>으로 보아 18세기<世紀> 후반<後半> 작품<作品>이라는데 부합<符合>된다. 육계<肉 >는 낮고 작으며 상호<相好>는 둥글고 육감적<肉感的>이어서 종교적<宗敎的> 신비감<神秘感>이나 자태<姿態>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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